HONEY BU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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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롤라





BGM: 시도 강 / 코코아








집 안에는 그 어떤 가구도 없었다. 이 집에 들어올 때 처음 산 소파도 이사 선물로 부모님이 해주었던 냉장고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이 휑한 집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내 힘으로 처음 산 내 집이었다. 물론 당연히 대출이 껴있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의사 일을 시작하면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내 집이었다. 그래서 더 애착이 컸다. 완공한 지 채 2년도 안 된 거의 새 집이긴 하지만 그래도 들어올 때부터 하나하나 점검을 했었다. 벽지부터 바닥, 몰딩 등등. 그러자니 어느 곳 하나 내 애정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 보았다. 거실 벽을 쓸자 피식 웃음이 났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고 나서 꿀꿀이가 여기에 섀도 복싱이라도 하듯 괜히 달려들어서 귀신이라도 있는 건가 혼자 겁 먹었었는데. 베란다 쪽 바닥에는 내가 술을 잔뜩 마시고 소파를 옮기겠다고 난리 치다가 살짝 흠집이 났고. 그 모든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산 지는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추억이 많았다. 나는 모든 곳에 내 기억이 서려 있는 집을 둘러보다가 겨우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탁- 문 닫히는 소리에 왠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캐리어를 끌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오세훈이 여전히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세훈의 집으로 들어갈 거기 때문에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큰 가전제품은 그다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다 산 지 얼마 안 된 것들이라 이참에 가전제품이 필요한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렇게 큰 짐은 줄였음에도 내 옷이나 책 등의 짐이 많았다. 어느 정도 사람을 시켜 옮기긴 했지만 자잘한 건 오세훈과 이렇게 함께 나와 옮기게 되었다. 나는 오세훈에게 다가가 캐리어를 놓았다. 오세훈은 그 캐리어까지 트렁크에 실었다. 평소에 세아를 유치원에 데려 가거나 할 때 쓰는 차가 아니었다. 뒷좌석과 트렁크가 아주 넉넉한 차여서 내 짐을 다 싣기에 넉넉했다. 





"다 가져왔어?"

"응."





캐리어까지 트렁크에 실은 오세훈이 문을 닫았다. 나는 조수석의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세훈도 운전석에 앉았다. 나는 쌀쌀한 날씨에 어느새 차가워진 손에 입김을 불며 히터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런 날 힐끗 본 오세훈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아 호오- 하고 불었다. 언제나 따뜻한 손이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그래선지 항상 손발이 찼다. 그런 나와 달리 오세훈의 손은 항상 따뜻했다. 언제 잡아도 마치 봄날의 포근한 바람처럼 포근하기만 했다. 





"추워."

"응. 얼른 집 가자."





오세훈은 뒷좌석에서 담요를 가져다 내 무릎에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그리고 내 코트의 목깃도 잘 여며주고 히터의 온도를 올렸다. 나는 시트에 파묻히듯 앉아 아파트 주차장을 보았다. 이제 여기 올 일도 없겠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고, 그렇게 나는 내 집을 떠났다.


이제 정말 내 집이 된 오세훈의 집에 들어서니 세아가 반갑게 웃으며 달려왔다. 손에 크레파스가 들려 있는 걸 보니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것 같았다. 달려오는 세아를 잡아 안아 올린 오세훈이 집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나한테 달려 오려던 세아가 내게 두 손을 뻗었다.





"어어? 선생님~!"

"선생님 손부터 씻고. 그리고 이거 선생님 옷에 묻히면 안 돼."





세아가 들고 있던 크레파스를 가져간 오세훈이 내게 고갯짓을 했다. 나는 세아에게 손만 살짝 흔들어 주고 현관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이모님이 짐을 챙겨 퇴근을 하셨다. 가시기 전에는 오세훈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마 세아 이야기를 한 듯 했다. 호호호 웃으신 이모님이 세아와 나에게도 인사를 하고 가셨다. 나는 세아를 끌어안은 채 TV를 보다가 오세훈을 힐끗 보았다.





"무슨 얘기했어?"

"급여."

"왜?"

"내년부터 좀 더 올려드리겠다고."

"오오~ 최저시급도 동결이라는데 웬일로 선심~?"





피식 웃은 오세훈이 우리 옆에 앉았다. 그리고 세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세아도 잘 봐주시고, 세아도 잘 따르니까."

"이모?"

"응, 이모."

"콩이 이모 좋아. 팥빙수도 만들어줬어."





이모님 얘기에 세아가 방실방실 웃으며 좋아했다. 나는 그런 세아를 꼬옥 끌어안으며 작은 머리에 살짝 고개를 기댔다.





"세아 빙수 좋아하는구나~ 무슨 빙수 제일 좋아해?"

"딸기 빙수!"

"우와, 딸기 빙수 맛있겠다. 선생님은 망고 빙수 제일 좋아해."

"망고!"

"응, 망고! 다음에 먹으러 갈까? 선생님이 망고 빙수 엄청 맛있는 데 아는데."





환하게 웃은 세아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나는 세아를 안은 채 오세훈의 어깨에 기댔다.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던 오세훈이 팔을 뻗어 그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리 저녁에는 뭐 먹어?"

"만두."

"만두? 헉, 직접 빚는 거야?"

"... 너 왜 기대하는 표정이야? 네가 그런 표정 지으면 왠지 걱정부터 돼."





진지하게 말하는 투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다리를 내려치자 녀석이 아야- 하면서 큭큭 웃었다. 





"너 자꾸 나 요리 못 한다고 무시해라?"

"하면?"

"하면...!"

"어, 하면."





딱히 그 후의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느새 세아도 나와 오세훈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런 세아를 보다가 오세훈을 찌릿 노려보았다.





"세아랑 못 놀게 할 거야!"





내 품에 안긴 세아를 가로채듯 끌어안자 오세훈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세아도 웃으면서 내 가슴팍을 토닥거렸다.





"나는 파파랑 놀 건데요?"

"그, 그치만...!"

"선생님이 참아요. 파파는 이쁘잖아요."





뭔가 업무 지시라도 하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답장을 보내던 오세훈이 멈칫했다. 그 말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나는 한참동안 세아를 끌어안고 웃었다. 오세훈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세아를 보았다.





"... 내가?"

"응! 선생님 화나면 파파 얼굴 봐요. 이쁘니까 화도 안 날 거예요!"

"아, 미치겠네. 그래. 너 이뻐서 봐준다, 내가."





오세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었다. 나는 그런 오세훈의 어깨에 다시 고개를 기대고 부비적거렸다.





"이쁜 세훈아. 형아 배고픈데 저녁 좀 빨리 먹으면 안 돼?"

"기다려."

"알았어. 이쁘니까 봐줄게."

"... 그 이쁘다는 말 좀."

"왜애? 파파 엄청 이쁘지~?"

"응! 파파 완전 이쁜이야!"





이쁜이라는 말에 다시 또 뒤집어져서 깔깔 웃었다. 오세훈은 한껏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세아가 와락 안겨들어서 결국 굳은 표정을 풀었다. 네가 그래봤자 별 수 있냐? 세아가 한 번 웃어주면 그렇게 또 사르르 녹을 거면서. 세아가 우리 셋 중 최고 이쁜이잖아. 


저녁에는 함께 만두를 빚었다. 집에서 엄마랑 아빠랑 같이 몇 번 빚어본 적은 있지만 그 때마다 엄마가 나를 밀어내곤 했다. 왜 그렇게 날 밀어냈는지 지금 완성작을 보니 알 것도 같았다. 이건 만두인가 밀가루 괴물인가. 옆구리가 터지거나 공기로 가득 채워진 듯 심각하게 헐렁한 만두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세훈이 만든 건 마치 공장에서 만든 것처럼 예뻤다. 나는 우와- 하고 테이블을 짚었다.





"야, 너 만두도 잘 빚냐? 와, 대박."

"선생님, 나두! 나두!"





세아가 내민 만두를 보니 내 것보다 훨씬 나았다. 나는 박수까지 짝짝 쳐주었다.





"우와- 세아도 만두 진짜 잘 빚는구나. 아빠 닮았나 보다, 그치?"

"응! 파파!"





나와 세아를 보며 피식 웃은 오세훈이 어느새 가득 채워진 만두판을 들고 일어섰다. 이제 둘 다 아빠라는 말에 익숙해진 듯 싶었다. 나는 오세훈이 자기를 아빠라고 지칭했을 때부터 틈만 나면 세아에게 아빠 얘기를 자주 해주었다. 그게 오세훈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또 세아에게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특히 비로소 자기를 진짜 아빠라고 할 수 있게 된 오세훈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나는 세아의 꼬마 만두까지 가져가 찜기에 넣는 오세훈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두 번째 판은 그래도 오세훈에게 나름 합격점을 받으며 같이 채울 수 있었다. 오세훈이 쪄온 만두를 한 입씩 먹으며 빚으니 모든 게 다 재밌었다. 세아도 재미있는 듯 했다. 나는 내 만두를 완성해 오세훈에게 내밀었다.





"짠! 이쁜이 만두!"





내 말에 녀석이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쁘다는 말에 되게 예민하네. 나는 큭큭 웃으며 오세훈의 볼에 입을 꾹 맞추었다.





"내 사랑을 받아줘, 이쁜아."

"... 먹기 싫은가 보지?"

"아아, 안 돼애-"





내 앞에 놓인 만두 접시를 가져가려던 녀석의 손을 잡았다. 세아도 같이 안 돼애애- 하고 외쳤다. 오세훈은 다시 접시를 내려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둘이 나 놀려 먹는 거에 맛 들려서는."

"놀려 먹는 게 뭐야?"

"예뻐해준다는 거야."





생글생글 웃으면서 세아에게 알려주자 오세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보았다.





"애한테 잘못 가르쳐주지 마."

"왜?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래도 세아야. 이뻐서 놀려 먹는 건 파파한테만 하는 거야, 알았지? 친구한테는 그러면 안 돼."

"네! 파파 계속 놀려 먹을게!"





방실방실 웃는 세아를 보며 오세훈이 이마를 짚었다. 아휴, 귀여워라. 세아 말이 맞네. 너 진짜 이쁜이 맞구나? 뭘 해도 이렇게 예뻐 보이냐. 아휴휴, 우리 이쁜이. 삐지기도 잘 삐지는 내 이쁜이.


만두를 잔뜩 빚어 반은 냉동실에 얼리고 나머지 반으로 만둣국을 해먹었다. 오세훈이 만둣국을 끓이는 동안 나는 세아와 놀이방에서 또 한껏 뛰어 다니며 놀았다. 얼마 전에 오세훈이 마법의 성이라는 장난감을 새로 사줬다더니 정말이지 엄청난 게 들어와있었다. 놀이방 자체도 큰데 이 방의 1/5은 차지할 듯한 크기의 큰 장난감이었다. 나와 세아는 그 안에 들어가 여기저기 타넘고 뛰어 다니며 놀았다. 


그렇게 놀다가 너무 힘들어서 세아한테 거의 반쯤 질질 끌려 다닐 때였다. 문이 열리고 오세훈이 저녁을 먹으라고 불렀다. 그야말로 구세주가 아닐 수 없었다. 내 등에 올라타 말처럼 이랴! 하고 달리던 세아가 꺄아- 하고 좋아하며 먼저 나갔다. 나는 엉엉 울면서 놀이방에서 기어 나왔다. 문 앞에 서서 그런 날 보던 오세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나를 어깨에 들쳐 멨다. 나는 짐짝처럼 오세훈에게 들려 가면서 팔랑팔랑 흔들렸다.





"엉엉, 힘들어~ 엉엉."

"우는 척 하지 마. 안 우는 거 알아."

"흐아아앙- 얼굴은 이쁜 게 못된 말만 하네."





내 말에 오세훈이 쓰읍- 하고 내 엉덩이를 탁 때렸다. 나는 이잇- 하고 녀석의 등을 투닥투닥 때렸다. 어느새 식탁 앞에 앉은 세아가 단호한 표정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밥상 앞에서 싸우는 거 아니야!"





오세훈과 한껏 투닥거리며 가다가 세아를 보았다. 나와 오세훈은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나를 다시 내려 의자에 앉혀준 오세훈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내 볼을 그러쥐고 가볍게 뽀뽀를 했다. 





"자, 싸운 거 아니야."

"그치? 둘이 안 싸웠지?"

"응."

"알았어! 이제 밥 먹어!"





세아의 의젓한 말에 우리 모두 웃었다. 오세훈은 세아의 옆에 앉아 뜨거운 만두를 후 불어 식혀 주었다. 나는 만둣국을 뒤적이다가 피식 웃었다. 누가 봐도 내가 만든 만두가 있었다.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고 예쁜 건 오세훈이 만든 만두. 다른 만두의 반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귀여운 꼬마 만두는 세아가 만든 만두. 그리고 어딘가 엉성하고 흠이 하나씩 있는 게 내가 만든 만두였다. 같은 그릇 안에 들어 있는데도 이렇게 티가 났다. 나는 큭큭 웃으면서 맛있게 만두를 먹었다.


세아는 일찍 잠이 들었다. 자기 전에는 우리를 양 옆에 눕히고 손을 꼬옥 잡기도 했다. 우리가 양 옆에 누워서 재워줄 때가 제일 좋은 듯 했다. 오세훈과 내가 만담이라도 하듯 번갈아 이야기를 해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세아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나와 오세훈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왔다. 그렇게 나오자마자 오세훈이 날 뒤에서 포근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본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한 잔 하고 잘래?"

"그래."

"안주 뭐 만들어 줄까."

"음... 숙성 연어 있지 않았어?"

"그래. 마시고 싶은 술 꺼내."

"네~"





내 엉덩이를 톡톡 친 녀석이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서재로 들어가 책장을 옆으로 밀었다. 술은 여기에 있었다. 세아의 눈에 안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고민하다가 반쯤 남은 위스키 하나를 꺼냈다. 위스키도 종류가 굉장히 많았는데 이건 반이나 마신 거 보면 오세훈 입에 맞는 것 같았다.


위스키와 잔을 들고 응접실에 들어서니 고요하면서도 포근한 안이 눈에 들어왔다. 이 곳은 왠지 오세훈이 본가에 살 때 지냈던 자기 방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일부러 그렇게 꾸민 건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뒷짐을 진 채 응접실을 둘러 보았다. 벽에는 미술품이 몇 가지 걸려 있었다. 미술 쪽은 아예 모르기 때문에 봐도 그냥 그림인가보다- 싶었다. 오세훈은 다 의미를 알고 산 거겠지? 어렸을 때도 이런 거 나한테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그랬었는데. 10년도 더 된 예전 일들을 떠올리다 배시시 웃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다정한 건 변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세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고 온 트레이 위에는 여러 안주가 있었다. 숙성 연어를 얇게 저민 것부터 해서 얇은 비스킷과 크림치즈, 케이퍼와 그린 올리브도 가득 있었다. 손목에는 아이스 버킷도 들려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버킷에서 얼음을 꺼내 잔에 담았다. 내 맞은편에 앉은 오세훈이 접시를 놓고 세팅했다. 


오랜만에 같이 마시는 술은 맛있었다. 또 분위기도 좋았다. 위스키 선택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이건 오세훈이 제일 좋아하는 술이라고 했다. 사실 위스키는 잘 마시지 않는데도 이건 내가 마시기에도 향이 은은하니 좋았다. 나는 케이퍼를 올린 연어를 한 입 먹고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두 다리를 올려 끌어 안으니 모든 것이 포근하고 좋았다.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면서 날 보던 오세훈이 조용히 웃었다.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세아 얘기를 하게 되었다. 오세훈은 얼마 전에 나를 앉혀 두고 거의 세 시간에 걸쳐 옛날 이야기를 해주었다. 세아가 돌아오면 나한테 숨기는 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래서 세아의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그래서 오세훈이 왜 세아를 도맡게 되었는지 등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서 기인한 오세훈의 죄책감도 알게 되었다. 


단순 그 죄책감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오세훈은 마침내 세아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여태 입양을 못 한 이유도 듣게 되었다. 그러자니 녀석이 이번에 결단을 내린 것을 그저 응원해주고 싶었다. 아마 다시 또 회장님과 맞서야 할 것이고, 거기에서 또 상처를 받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오세훈에게 그 힘든 길을 가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오세훈이 행복해지는 길이고 나아가 우리 모두 한 가족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회장님은 알고 계셔?"

"알겠지. 들리는 얘기가 있을 테니까."

"훼방을 놓거나 하진 않으시겠지?"





내 말에 오세훈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봤자 노인네지. 지가 뭘 어쩔 거야."

"어휴, 저 입, 입."





오세훈이 큭큭 웃었다. 세아가 보고 배울 수 있으니 말 좀 조심하라고 했지만 사실 오세훈이 회장님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딱 반 정도만 진심이었다. 나 같아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착하고 순수한 세아는 그런 할아버지라도 좋아하겠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 아이를 지켜야 하는 어른이니까.





"준면아."

"응?"





비스킷 위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그 위에 연어를 올려 카나페처럼 먹다가 고개를 들었다. 오세훈은 잔을 쥔 채 그 잔잔한 표면만 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술만 바라보던 오세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이번엔 잘할 거야."

"..."

"절대 안 놓칠 거야."





녀석의 눈이 단단했다. 오세훈이 여태 놓쳤던 것들을 떠올렸다. 처음은 아마 나였을 것이다. 무서워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스스로 놓아버린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그걸 12년 후에나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시 만났다. 어쩌면 그 때부터 만나지 않았던 게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 언젠가 오세훈이 말했던 것처럼 20대의 어린 나는 오세훈 옆에서 지치고 망가졌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 후로는 평생 다시 만나지 않았겠지. 하지만 30대에 다시 만난 우리는 그 때보다 훨씬 단단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않겠구나.


그 다음에 놓친 건 또 뭘까. 사랑하는 누나? 하나뿐인 조카? 그게 무엇이든 나는 지금의 오세훈이 두 번 다신 그 소중함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내 앞에 앉아 날 똑바로 바라보는 오세훈의 눈만 마주해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단호한 표정의 오세훈을 보면서 푸스스 웃었다.





"응. 잘할 거야."

"네가 옆에 있어줘야 돼."

"그럼. 평생 붙어 있을 거야. 너 내가 말했지? 나 한 번 잡은 건 절대 안 놔준다고. 네가 못 도망치는 거야, 이제."





오세훈의 입가에 간지러운 미소가 걸렸다. 나는 카나페를 우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위스키가 담긴 내 잔을 들고 오세훈의 무릎에 앉았다. 녀석은 그런 내 허리를 감싸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나는 술잔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녀석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네 미래에 날 데려와줘서 고마워."





내 말에 오세훈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걸렸다. 나는 부드러운 머리칼에 쪽 입도 맞추었다.





"내 미래에도 네가 찾아왔어."

"끝까지 있어줄 것 같아?"

"응.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너 두 번 다시 도망 못 가게 내가 손 꼭 잡고 있을 거야. 내 컨셉 악바리잖아. 내가 너 절대 안 놓쳐."





주먹까지 불끈 쥐고 말하자 오세훈이 못말린다는 듯 웃었다. 나 역시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와 같은 위스키향이 나는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우리는 연신 입가에 미소를 건 채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다.


11월도 어느덧 반이 지났다. 어김없이 출근을 했고 별 일 없이 진료를 보았다. 환절기라 그런지 요새 다시 감기 환자가 늘었다. 나는 엄마 품에 힘없이 안겨서 가쁜 숨을 헐떡이는 아이를 진찰하고 청진기를 내렸다. 그리고 처방전을 간단하게 쓰고 어머님을 보았다.





"열이 좀 있네요. 기침을 좀 많이 하니까 물 자주 마시게 하시고 가습기 꼭 틀어주세요. 정훈이 오늘 주사 하나만 맞고 갈게요."





주사라는 말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아파서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는 터라 울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 했다. 이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이 주사를 무서워 하는 건 알지만 증상이 심할 때는 주사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훈이의 손에 비타민 사탕을 꼭 쥐어주었다.





"주사 한 번 따끔하면 정훈이 이제 안 아플 수 있어요. 정훈이 씩씩하게 주사 맞고 다시 오면 선생님이 선물 줄게요."





내가 준 사탕을 꼭 쥔 채 펑펑 울던 아이가 서서히 울음을 그쳤다. 내게 꾸벅 인사를 한 어머님이 아이를 안고 나가셨다. 혜주씨는 바로 주사실로 어머님을 안내했다. 아휴, 속상해. 왜 나쁜 병균들이 착한 애기들을 괴롭히는 거야.


다음 환자의 진료를 보고 문서를 정리하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네- 하고 대답하니 엄마 손을 붙잡은 정훈이가 보였다. 아까 한참을 울어서 그런지 눈이 아직도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정훈이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우와~ 정훈이 주사 맞고 왔구나~ 정훈이 완전 용감한 어린이네?"





내 말에 정훈이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서랍을 열어 티라노 사우루스 모형 장난감을 하나 꺼냈다. 그걸 책상 위에 탁 올려놓자 정훈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저 나이 또래 아이들 중에 공룡 싫어하는 아이는 절대 없기 때문이었다.





"자, 용감한 어린이한테만 주는 선물. 정훈이 용감하니까 티라노 사우루스도 안 무섭지?"

"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 정훈이가 내게서 공룡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소중하게 끌어안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도 했다. 어머님에게도 다시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으니 피식 웃음이 났다. 이래서 소아과를 못 벗어나겠다니까. 다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여섯 시가 거의 다 되어가는 때에 컴퓨터를 끄고 일어섰다. 쭉 기지개를 켜니 드디어 오늘 하루도 끝이 났다는 생각에 안도감부터 들었다. 가운을 벗고 코트를 집어 드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하고 대답하니 문이 열리고 세아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세아를 안고 들어온 오세훈이 생긋 웃었다. 나는 코트를 입으려다 말고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우와! 우리 토끼 공주님~"





오세훈이 바닥에 내려주자 세아가 냉큼 내게 달려왔다. 나는 세아를 안아 올려 볼에 꾹 입을 맞추었다. 분홍색의 부드러운 케이프를 입은 세아의 목에는 솜털같은 방울도 달려 있었다. 정말 동화 속 토끼 공주님처럼 예쁘게 입고 온 세아를 보니 벌써 피곤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오세훈이 내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들었고, 나는 세아를 안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간호사 선생님들도 모두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데스크 앞에 서서 세아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안녕히계세요~"

"응, 세아 잘 가~ 저녁 맛있게 먹구."

"네! 언니두요!"





언니라는 말에 모두들 꺄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한 오세훈도 우리를 뒤따라 나왔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연신 세아를 꼬옥 끌어안았다.





"세아야. 우리 저녁에 뭐 먹을까?"

"피자!"

"피자 먹을까? 음, 선생님은 치즈 엄청 많이 들어간 거 먹을래."

"나두!"

"정말? 그래. 세아랑 선생님이랑 파파랑 나눠 먹자. 콜라두 마시까?"

"웅!"

"그래, 콜라두. 파파도 피자 좋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을 누르는 오세훈을 보며 푸스스 웃었다. 살짝 몸을 숙여 가슴팍에 고개를 묻자 또 겨울 냄새가 났다. 이제 슬슬 진짜 겨울이 와서 그런지 이 냄새가 더 익숙하고 좋았다. 제 품에 안겨든 나와 세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오세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응- 하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밖으로 나와서는 세아가 오세훈을 따라 신나게 뛰어갔다. 나 역시 오세훈을 따라 차가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늦가을의 찬 공기 너머로 아득한 겨울 냄새가 나는 듯 했다. 나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한참동안 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준면아."





그러다 오세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아를 안아든 오세훈이 뒤돌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푸스스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세아 역시 내게 손을 뻗은 채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두 사람을 보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갔다.





"같이 가!"





쪼르르 달려가 오세훈의 손을 잡고 팔짱을 꼈다. 와락 안겨든 나를 보며 푸스스 웃은 오세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아는 허공에 호오- 하고 새하얀 입김을 불고 있었다. 모두가 다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분명 또 추운 계절이겠지만 왠지 마음은 전혀 추울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겨울에도 우린 함께 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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