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공식

37


W. 롤라





BGM: 4월의 UFO / 낯선 행성에서의 하루









10월도 벌써 반이 지나간 날이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누워서 하늘 보기가 좋은 날이기도 했다.


준면이와 그렇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준면이는 오늘도 일찍 출근을 했다. 나는 준면이를 배웅한 후 청소를 시작했다.


어제는 준면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 집으로 합칠 지를 고민한 것이다. 병원 일을 생각한다면 준면이네 집으로 함께 합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준면이 집보다 내 집이 좀 더 넓고 좋기도 한 게 조금 고민이 됐다. 준면이도 그걸 고민하는 듯 했다. 아니면 아예 병원 근처의 다른 곳으로 새로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지금 집의 컨디션과 별반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어쨌든 우리는 합치기로 완전히 결정을 했고, 어떻게 할 지는 차차 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있는 준면이 집에 애착이 갔다. 나는 틈만 나면 집을 청소하고 쓸고 닦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청소기를 들고 서재의 문을 열었다. 


청소기를 다 밀고 이제 침실로 가려는데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책 중 가로가 길어 툭 튀어나온 게 그 이유였다. 나는 청소기를 내려놓고 그걸 꺼내 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었다. 이걸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앨범을 펼쳤다.


나에게는 준면이의 것과 같은 졸업 앨범이 없었다. 2학년까지만 마치고 캐나다로 이민을 갔기 때문이었다. 그 점은 캐나다에 와서도 아쉬웠다. 그래서 몇 년 후 한국에 다시 들렀을 때 그 해의 졸업 앨범을 사가지고 돌아갔다. 졸업생 중 이 앨범을 파는 사람을 수소문해 겨우 구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도 이 앨범이 있다. 하지만 준면이의 집에 있는 앨범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나는 앉자마자 바로 3학년 6반을 폈다. 우리 학교는 거의 항상 성적순으로 반 배치를 하기 때문에 이과 전교 1등인 준면이는 3학년에도 이과의 1반인 6반이었다. 6반을 펴 몇 장 넘기자마자 바로 준면이의 독사진이 나왔다. 나는 그 사진을 보다가 흐뭇하게 웃었다. 


고등학생 때도 너는 참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너는 알까? 나는 그 때부터 너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는 걸. 네가 처음 말 걸어준 것도 좋았고, 네가 먼저 내게 인사를 해준 것도 좋았고, 네가 날 잊지 않고 매일 찾아주는 것도 참 좋았다. 너에게는 온통 좋은 것뿐이었다. 나는 그 때를 생각하며 절로 피어나는 웃음을 애써 감추지도 않았다.


준면이를 처음 만난 건 2학년 새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김준면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입학 수석이기도 했고 워낙 인기가 많은 녀석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백 편지도 꽤 많이 받았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글을 좀 잘 쓰는 게 알려져 편지 대필을 해주게 되었다. 그걸 준면이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유일하게 제대로 활동하는 도서부원이었다. 도서부원이 여럿 있긴 하지만 선생님이 체크할 때만 올 뿐 녀석들은 도서실에 잘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도서실에는 거의 항상 나 혼자였다. 그게 좋았다. 어차피 아이들이랑 엮이는 것보단 나 혼자 있는 게 낫기 때문이었다. 나를 두고 어떤 소문이 퍼져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느니 그냥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로 남아 있는 게 좋았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 혼자 도서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선생님인가 싶었다. 하지만 들어선 사람은 예상치도 못 한 사람이었다. 바로, 김준면. 그 유명한 김준면이었다. 준면이는 설렁설렁 걸어와 내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잠시 날 빤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야."

"ㅇ, 어?"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김준면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너 편지 대필하냐?"

"어?"

"네가 애들 편지 대신 써주냐고."





단번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들켰구나. 어떻게 알았지?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김준면에게 보내는 고백 편지를 쓰던 걸 떠올렸다.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여자애들이 꽤 있었다. 평소에는 나에게 말을 전혀 걸지 않는데 걸 때면 모두 다 그런 이유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김준면은 한껏 여유로운 태도로 날 대했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김준면이 보고 있는 도서 대출지를 힐긋 보았다.





"내가 일주일에 고백 편지를 두세 통은 받거든? 근데 말투나 인용하는 글귀가 거의 비슷한 거야. 꼭 정해진 폼에서 골라 쓰는 것처럼."

"..."

"걔네가 다 똑같은 시집을 봤을까?"

"..."

"아니면, 한 명만 봤을까?"





김준면의 시선에 내가 읽고 있던 시집이 닿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시집을 덮어 뒤늦게나마 책상 아래로 숨겼다. 부끄러웠다. 내가 보낸 연서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다 생각하니 그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었다. 대필해준 거? 그건 딱히 부끄럽지 않았다. 다들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그럴 재간이 없으니 내 능력을 빌린 거 아니야. 나는 그것도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부끄러운 건 내가 전한 내용이었다. 내가 쓴 모든 내용을 김준면이 다 알고 있다 생각하니 화르륵 얼굴이 불타오르는 듯 했다. 





"야, 오세훈."

"어?"

"... 그 오세훈이랑 왜 이렇게 다르냐. 한 놈은 재수 없고, 한 놈은..."





찌질하지? 굳이 뒷말까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에 괜히 또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런 평가를 받는 게 처음도 아니고 딱히 스트레스 받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김준면한테도 그런 평가를 받는다는 게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됐다. 너 이제 편지 써주지 마. 아님 레퍼토리를 바꾸든가, 팍씨."

"아, 알았어..."

"그래. 나 먼저 간다. 선생님 오시면 나 반에서 자습하고 있다고 해. 아, 너 나 몇 반인진 아냐?"

"아, 아니..."





6반. 2학년 6반 김준면. 전교생이 다 알지. 모르는 사람은 전학생밖에 없겠지.





"그래? 애들 다 알던데 너 진짜 이상하네. 나 6반이다. 2학년 6반 김준면, 알겠지?"

"응..."

"지나가다 보면 인사 좀 하고."





인사? 인사라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다 김준면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김준면의 손이 닿은 어깨를 매만지다가 배시시 웃어버렸다.





"응..."





그리고 김준면은 왔을 때처럼 다시 휘적휘적 걸어 도서실에서 나갔다. 도서실에서의 볼일은 이게 전부였던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혼자 남은 도서실 안에서 피식피식 웃었다. 김준면. 인사해도 돼? 친구처럼? 그래도 돼? 나는 인사 좀 하라는 말을 남기고 간 준면이를 생각하며 배시시 웃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만 그 생각이 났다. 이 학교에 와서 내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모두들 나를 피하기 바빴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엄마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너무도 이해했다. 내가 엄마였어도 그렇게 반쯤 미쳐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유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두운 생각은 더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꼭 덮은 채 김준면을 떠올렸다. 김준면. 입에 담기만 해도 왠지 모르게 벅찬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감히 너를 준면아- 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내가 감히 너한테 인사를 해도 되는 걸까. 나는 여러 생각을 하다가 행복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3학년 선배들에게 불려갔다. 모 기업의 외동 아들이라는데 내가 입학한 첫 해부터 나를 점 찍어 두고 괴롭혔다.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도 이 자식이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는데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귀찮을 뿐이었다. 





"야, 오늘은 얼마 있어?"

"... 이게 다예요."





돈 뺏기는 건 다반사였고 가끔은 맞을 때도 있었다. 덤비고 싶었지만 수적으로 열세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부모님에게 또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은 이미 내 동생 일만으로도 힘든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에게 내 걱정까지 끼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돈 좀 많이 들고 다녀라, 어? 집도 잘 사는 애가."





지는 나보다 더 잘 살면서.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피식 웃자 선배 자식이 날 힐긋 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뭘 쪼개, 재수 없게."





나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한 번 쓸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참아야지. 참아야지. 





"야, 야. 꺼져. 아, 저 새끼 그냥 보고만 있어도 존나 답답해."





가방을 챙겨 들고 인사를 꾸벅했다. 그제야 나는 교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 언제쯤 졸업할 수 있으려나.


그렇게 반에 돌아와 오전을 보냈다. 역시나 나에게 말을 거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이게 마음 편했다. 밥 역시 나 혼자 먹었다. 오늘은 안 오겠지? 그래. 지난 번에는 편지 대필 좀 하지 말라는 말 하려고 온 거였으니까. 나는 도서실에 홀로 앉아 조용히 도시락을 먹었다.


5교시가 끝나고 6교시가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텀블러를 들고 물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야, 하고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김준면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어, 미, 미안."

"... 뭐가 미안해?"

"어? 아니..."

"... 봤으면 인사 좀 해."

"어?"

"인사 좀 하라고."





진심인가? 내가 왕따인 걸 모르는 건가?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양 아무도 나한테 말 안 걸려고 하는데. 그랬다간 자기도 왕따를 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인가. 아무튼 아무도 나한테 말 따위 안 걸려고 하는데 김준면은 왜? 정말 진심인가?





"해도... 돼?"

"뭐? 뭘?"

"... 인사..."

"그걸 왜 내 허락을 받아?"

"... 그게..."

"아, 해! 그런 거까지 허락 받고 사냐. 진짜 인생 답답하다, 너."





어이 없어 하던 김준면이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어깨 좀 펴고. 간다. 다음에 보면 인사 먼저 해라, 너."

"어? 으응..."

"뭐라고?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려."

"아, 알았어."

"그래, 인마. 좀 크게 말해. 누가 너 잡아 먹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나를 보며 지나친 김준면도 슬쩍 웃고 있었다. 나는 김준면이 5반의 앞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복도에 멍하니 서 있었다. 김준면의 손길이 닿은 어깨에 꼭 햇살이 들이친 것 같았다.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것 같던 햇살이 퍽 어색했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인사해도 되는구나. 꼭 친구처럼? 응, 친구처럼. 나는 김준면이 만졌던 어깨에 손을 얹고 배시시 웃었다.


6교시 수업 시간은 내내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국어 시간이었음에도 그랬다. 나는 노트 한편에 계속 김준면의 이름을 썼다. 김준면. 김준면. 김준면. 이름도 왜 김준면일까? 똑바른 직선만 가득한 이름이라 정말 뭐든 다 바르기만 할 것 같아. 너는 나처럼 나쁜 생각도 안 하겠지?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나를 괴롭히는 녀석들을 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 구체적으로 계획도 세워 본 적이 있어. 물론 직접 해볼 일은 없겠지. 그래도 그런 생각은 가끔 해. 저 녀석들을 어떻게 죽일까. 어떻게 복수할까. 하지만 너는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 없을 것 같아. 애초에 그럴 환경도 아니겠지. 너는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우리 학교에서 널 싫어하는 녀석이 있을까? 그런 녀석이 있다면 오히려 내가 더 화날 것 같아. 너는 정말 좋은 아이잖아? 아무도 나한테 말을 걸어주지 않았는데 너만, 유일하게 너만 나한테 말을 걸어줬어. 너는 참, 지독하게 착한 아이야.


그렇게 6교시 국어 시간을 김준면 생각만 하다 홀랑 날리고 나니 약간 허탈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아이들이 신나게 매점으로 뛰어가는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어이없이 시계를 보았다. 고개를 돌리니 창밖으로 슬며시 봄이 묻은 나뭇가지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니 또 김준면이 생각났다. 너는 봄을 좋아할까? 나는 봄이 좋은데. 물끄러미 그 나뭇가지를 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너도 봄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아니야. 사실 여름도 좋고 가을도 좋고 심지어 겨울을 좋아한대도 괜찮아. 나도 그걸 좋아할래. 네가 좋아하는 건 나도 다 좋아하고 싶으니까.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저 멀리 김준면이 보였다. 김준면의 주위에는 아이들이 잔뜩 있었다. 어림잡아도 대여섯 명은 돼보였다. 모두들 김준면을 사이에 두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작 그 사이에 있는 김준면은 그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듯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부럽다기보다는 신기했다. 저런 아이가 전교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말을 걸어준다는 게 신기했다. 너는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인사를 해도 좋다고 했던 걸까. 내가 왕따여도 상관없는 걸까? 하긴, 나한테 말을 건다고 해서 아이들이 널 싫어할 일은 없으니까. 그래서 동정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동정이래도 좋았다. 나는, 그냥 네가 참 좋았다.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도 인사해주는 것도 그냥 모든 게 다 좋았다. 


그 때 알았어야 했다.


나는, 이미 너의 모든 것을 다 사랑하게 되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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